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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영화관

레버넌트 (이냐리투 2016)...스포일이 아주 심함..

 

예수와 닮았나...?

 

창세기의 이미지와 예수의 이미지가 중첩하여, 남미인이 가질법한 죄와 벌에 대한 기독교적 관념, 인간 구원에 대한 기독교 적관념이 잘 표현된 영화.

남미지역이 문화적으로는 거의 스페인과 같을 것이므로(남미 민족주의자들은 펄쩍 뛰겠지만...) 영화에 나타난 관념은 거의 스페인의 골수 카톨릭의 것으로 보인다.

(남미의 하층민과 달리, 남미 백인의 문화는 유럽 특히 이베리아반도가 표준이지 않은가...? 특히나 종교는...)

 

원정 대장은 빌라도이며, 300달러를 받는 피츠제럴드는 유다이고, 죽은 아들과 글래스는 일인다역을 하는(삼위일체인..) 예수이며...

그기다가, 미국인의 원죄라 할 인디언이 착한 사마리아인으로 등장하는데, 인디언들은 백인 예수를 구원하여 '재생'시킨다.

그를 공격한 곰은 그 가죽으로 글래스를 감싸 엄혹한 추위에서 살아남게 만들어 준다.(이 주제는 아마, 곰 토템의 신화를 차용한듯)

 

사슴을 쏜 개울가에서의 카메라 워크는 물 위를 떠돌았다는 '영'의 시각을 보여주는데, 바로 이어 '숨 쉬어라' 는 정언명령이 떨어진다.

이 '숨'이야말로 신이 인간에 불어넣은 것이며, 그것은 인간의 요소 중에서 가장 신적인 것이 아닌가(물론, 기독교의 주장이다...)

그 숨은 즉 영혼이 되어 몸이라는 감옥에 갇히고, 감옥인 몸은, 지상의 요소이므로 필연적으로 죄와 관련되고...

그리하여, 쉼없이 죄의 바퀴가 순환하는 것인데...인간은 하릴없이 숨을 쉬며 이 세상의 생을 이어나가고 있다...

 

글래스는 피의 세례를 통과한다.

 

글래스의 고난은 곰-물(추위)-불-피로 이어지는데, 이건 물의 세례와 불의 세례 그 다음 피의 세례를 연상시킨다.

불의 세례를 통해 재생한 글래스는 피의 세례로 거듭난 뒤( 인류 역사상 예수라 불리는 사내말고는 죽었다가 살아난 자가 없지 않은가..)

 

신의 뜻으로 복수를 수행하는데, 그건 다름아닌 죄진 인간에 대한 신벌이다.

 

악당, 유다, 사탄...톰 하디의 연기가 기막혔다.

 

그러나, 신의 뜻으로 죄인을 처단한 글래스 앞에는 다시, 뜻모를 인간이 나타나는데...

 

즉 그는 마지막 장면에서 아내의 모습인 마리아를 본다(마리아는 즉 구원을 상징하는 여성성의 상징이 아닌가...카톨릭에서는 그녀에게 구원을 기도하지 않는가)

마리아의 환상을 보는 그의 표정은 너무나 곤혹스럽다.

 

복수 이전, 그의 아내는 환상 속에서 항상 행복한 모습으로만 나타났는데,

그가 막상 '살인자'(물론, 그는 복수 이외에도 무수한 사람을 죽이지만, 그에게 의미있는 혹은 허용된 혹은 '의무였던' 살인은 피츠제럴드를 처단하는 것이었으므로,

그는 복수를 통하여 의식적인 살인자가 된다.)가 된 그는 마리아를 기쁘게 만나지 못하게 된다.

그건 다름아닌 악마가 죽어가면서 남긴 한 마디 말.

 

..그런다고 아들이 살아오냐?

 

때문인데...

 

영화 속에서 내내 예수의 역할을 충실히하며, '전투하는 교회' 라는, 정의를 손수 실현시키는 자로서의 예수를 구현하다가

 

막상 전투가 승리로 끝나는 순간, 그는 자신이 인간임을 자각하는 것이다.

그에게 즉 인간인 그에게 복수와 살인은 결코 구원이 아닌 것인가?

그 살의는 오히려 그가 살아 남을 수 있었던 원동력이 아니었던가?

숨을 계속 쉬는라는 정언 명령만이 '아버지'가 아들에게 줄 수 있는 한마디 말인 것인가?

 

마지막 장면의 디카프리오의 연기는 절정이었다.

 

 

감독 특유의 시각이 잘 반영된 볼만한 영화.

(그렇다고 금정이 기독교적 관념을 찬동하는건 아니다...이 영화에도 나타나는 종말론적인 세계관은 특히나 금정이 질색하는 것이다.)